프로 사진가의 착각


        8X10필름 카메라를 사용하면 수준이 높다.


  무조건 8X10필름 카메라로 촬영하기 위해서는 자동차가 필요하고 높은 산이라면 혼자서 장비를 이동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8X10필름 카메라가 고정되기 위해서는 무겁고 튼튼한 삼각대가 필요하고, 필름을 보관하는 하드박스만해도 상당한 크기와 무게를 감당해야 한다. 렌즈 또한 상당히 크고 무거우며 노출계, 암백 등 여러 가지 액세서리가 필요하다. 카메라를 들고 아웃도어에 나가 몇Km를 걷는다면 엄청난 체력이 소모될 것이고 온몸이 땀으로 젖을 수밖에 없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니 가벼운 카메라를 이용해서 답사와 샘플촬영을 하는 경우도 있다.
   8X10필름 카메라를 사용하는 이유는 더 디테일이 있고 풍부한 계조를 얻어 더 크고 좋은 프린트 결과물을 얻기 위함이다. 문제는 그러한 대상물 즉 피사체는 50년대 안셀아담스(Ansel Adams)가 이미 다 했던 작업이고 위대한 사진가라는 찬사를 받은 범위에서 벗어나지 못하거나 대부분은 그보다 못하다는데 있다. 또한 힘들게 이동하랴, 피사체 찾으랴 하는 어려운 과정, 촬영행위에서 고통과 땀을 예술 행위로 착각하여 자기 최면에 빠지는 것을 수준 높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조그만 생각해보면 TV도 거의 보급되지 모했던 1950년대의 삶과 휴대폰으로 영상통화를 하고 음악을 듣고 인터넷을 하는 디지털정보화 시대인 지금은 전혀 다른 세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술가의 존재이유 중 하나가 미래를 예측하는 일이고, 과거를 답습하는 것을 죄악으로 생각하는 것은 기본적인 상식이다. 현재를 살고 있는 예술가라면 지금의 현실을 자신의 작품으로 어떻게 바꿀 것인가에 목표가 설정되어야 한다. 더 많은 촬상소자의 더 큰 카메라를 사용하고 8X10, 11X14 필름 카메라를 사용하는 것 하고 세상을 바꾸는 작업을 하는 것 하고는 관련이 없다. 작업 과정에 땀을 흘리는 것과 예술행위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것으로 그러한 도구를 사용한 것을 내세우는 사진가 치고 훌륭한 사진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것으로 자랑하고 시간을 낭비하다 보면 세상을 바꿀 더 깊이 있는 사고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사진도구는 자기만의 세계 즉 나만이 할 수 있는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한 작업에 도움이 되고 더 좋은 결과물과 더 오래 보존될 수 있으면 충분하다. 현재는 디지털카메라가 더 좋은 해상감을 갖고 있고, 보존성 또한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디지털 프린트가 오래간다. 8X10필름 카메라도 대형프린트를 하기 위해서는 필름을 스캔하여 디지털프린트를 하는 것이 상식이 되었다. 멀쩡하게 사진 대학원에 다니는 예비 사진가가 8X10필름 카메라를 사용하는 것이 사진 수준이 높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한심함을 넘어서 측은하기까지 하다. 그런 사람들이 졸업 후 누군가를 가르친다면 사진계의 발전은 절망적이다. 더구나 독일의 어떤 유명한 사진가가 8X10필름 카메라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그 사진을 흉내 내기 위해 사용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면, 바보가 아니라면 다시 생각해 보라고 충고해 주고 싶다. 10~15년 전 그들이 그런 작업을 할 당시에는 8X10필름 카메라를 사용하는 것이 대형프린트(스캔하여 디지털프린트)를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을 뿐이다. 컴팩트 디카, 심지어 휴대폰카메라를 사용하여 작품을 만들어 세상을 변화 시키는 일에 더 많은 기여를 하고 있는 훌륭한 사진가도 많다. 쓸데없는 곳에 젊음과 에너지를 낭비하지 말고 책을 읽고 세상을 넓게 보는 일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내라고 충고해 주고 싶다. 물론 8X10필름 카메라를 사용해서 그동안 보지 못했던, 새롭고, 세상을 바꾸는 작업을 한다면 더 훌륭한 것은 당연하다.





        사진기술로 승부하려 한다.


   좋은 사진을 얻기 위해서는 엄청난 기술이 필요할 것 같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아무리 복잡한 디지털카메라도 셔터속도와 조리개를 조절하여 이미지를 만드는 행위에 불과하다. 필자는 사진학과 입시 때마다 공정성을 각지 위해 질문서를 미리 학교에 제출한다. 50문항이 기본인데 다 채우는 것이 무척 고역이다. 그만큼 기술적으로 문제를 낼 것이 그리 다양하지 않다는 것이다.
   사진을 전공했거나 프로사진가들은 지나치게 사진기술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남의 사진전시장에 가서 아무렇지도 않게 “어떤 카메라를 사용했습니까?”라고 묻는다. 그런 유치한 질문을 하는 것은 질문자의 관심이 그렇다는 이야기이다. 작가에게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어서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작업을 했습니까?”라고 묻는 것이 오히려 성의 있는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술자리에서 안주로 삼는 것이. “어떤 유명한 사진가는 대형카메라 필름도 갈아 끼울 줄 모른다더라. 어떤 사진과 교수는 포토샵은 고사하고 인터넷도 할 줄 모른다더라. 어떤 놈은 기껏 필름으로 찍어 놓고 디지털프린트 한다더라.” 등을 대화랍시고 한다. 디지털카메라 쓰는 사람이 왜 대형카메라에 대해서 알아야 하는지, 왜 모든 사진과 교수가 포토샵을 할 줄 알아야 하는지, 필름으로 찍으면 왜 아날로그 프린트를 해야 하는가를 필자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그런 것을 다 할 줄 알면 그러한 부분을 못하는 사진가보다 더 상대적으로 위에 있거나 나아가 더 훌륭하다고 착각하고 있다면, 그가 사진과 대학원을 나온 교수 집단이라도 필자는 형편없는 아마추어라고 말해주고 싶다.
   사진전공자, 사진전문가, 프로사진가들이 누구 기술이 더 좋은가를 경쟁하고 있을 때 미술을 전공하거나, 전혀 다른 곳에서 사진을 도구 수단 문화로 접근한 예술가들이 더 각광을 받고 있는 것도 엄연한 현실이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작업을 하는데 사진을 사용한 예술이 가짜와 진짜가 공존하는 세상, 사이버와 현실이 공존하는 세상에 사진은 좋은 도구와 수단 문화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을 바꿀 큰 생각으로 경쟁하는 집단과 누구의 사진기술이 더 뛰어난가를 경쟁하는 유치한 집단과는 아예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예술의 근본을 생각하는 쪽이 더 훌륭하고 더 좋은 평가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 더구나 새로운 도구와 문화 사고를 거부하고 수십 년  전의 도구에 머물러 있고, 생각하는 고민마저 과거의 사고에 머물러 있다면 예술가로서 존재이유는 없다. 단, 그 도구를 좋아하고 그 시대의 작업을 좋아하는 동호인으로 남을 수는 있을 것이다. 주위에 동호인 활동을 예술행위로 착각하거나 쓸모없는 아집을 장인정신이라고 착각하는 프로들을 흔히 볼 수 있다. 그러한 사람들은 예술가의 가장 중요한 자질인 도전정신이 부족하거나 더 이상 공부하기 싫어하며 자기가 그저 할 수 있는 일에 안주하고 여러 가지 변명으로 위로 받으려는 존재에 불과하다.
   그런 사람들은 세상의 변화를 싫어하고 예술과 작품, 예술행위를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의 안식처쯤으로 포장하거나 변명하는 경향이 많다. 더 큰 문제는 그러한 행위가 아마추어의 눈에는 멋있게 보이거나 나도 할 수 있다는 착각을 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수많은 그러한 가짜 예술가들이 누군가를 가르치고 있고 그러한 것을 예술행위로 동조하는 집단이 공존하고 있는 현실이다. 공부해야 그것도 엄청난 공부를 해야 진짜와 가짜를 구분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고, 그래서 그것이 현재 예술가들의 가장 큰 화두이다.




   - 사진예술.2009.09.p82.황선구의 사진이야기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