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끝-이라는 것은 언제나 묘한 감정을 불러온다. 하루의 끝에서 스물네 시간에 대한 아쉬움을 느끼다보면, 인생의 끝이라는 거대한 종결 앞에서 나는 제대로 대처할 수 있을까, 흐르는 눈물을 참을 수 있을까, 두려움이 든다. 막연한 두려움은 연말이 되면 더욱 심해진다. 끝이라는 것은 어째서 언제나 후회를 동반하는 것일까. 한 해의 끝에서 내가 일 년 동안 무엇을 잃었나 손가락으로 꼽다 두 손이 모자라 두 주먹으로 머리를 쥐어박았다. 넌 좀 맞아야해.


2.

12월이 중순으로 접어들면 언제나 의식처럼 하는 일이 있다. 나는 베란다에서 작은 소포상자를 들고 온다. 그 상자 속에는 나의 십대 시절이 온전히 들어있다. 수학여행 사진부터, 빌렸다가 돌려주지 않은 책, 그리고 메모들, 편지들, 쪽지들, 앞쪽만 쓰여 있는 일기들, 몰래 숨겼던 성적표와 딱 한 번 받았던 상장까지. 동그란 글씨만큼 즐겁던 때. 유독 이응을 크게 썼던 것도 그 때문일까. 나는 하룻밤 꼬박 그 기록들을 읽는다. <너 어떻게 지영이랑 같이 매점에 갈 수 있어?>라고 따지는 쪽지를 보다가, 그 심각한 문장에 웃음이 나오고 만다. 이것이 내가 한 해를 마감하는 방식이다. 절차라고 해야 할까.


3.

올해에도 역시 상자 속 수북한 기록을 읽다가, 작은 필통 하나를 발견했다. 흔들어도 아무런 소리 나지 않기에 열어보지 않았던 철제 필통. 필통을 열자, 그곳에는 갱지 쪽지가 하나 들어 있었다. 나는 쪽지를 소리 내어 읽었다.

<나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너를 떠나지 않겠음.>

생각났다. 그것은 중학생일 때 단짝이었던 진수의 글씨였다. 어떤 상황에서 이런 선언을 했던 것일까. 고작 중학생 둘이서. 어떠한 일이 있어도 떠나지 않겠다니. 나는 괜스레 옆을 둘러보았다. 넌 없잖아. 어떠한 일이 있어도-가 아니라 아무 일 없어도 다들 떠나고 떠나는 세계라고, 여긴. 나는 중얼거렸다. 어렸을 때는 이런 할리퀸 소설 같은 생각에서 빠져있었구나. 문득 진수에게 이 쪽지에 대해 말하고 싶어졌다. 상자를 뒤져 전화번호수첩을 꺼냈다. 집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나처럼 이십 년이 지나도록 이사를 가지 않은 사람도 있으니, 기대하는 마음으로 전화를 걸었다. 한 할머니가 그 사람들은 작년에 이사를 갔다며 십 분을 기다리게 하더니 번호를 알려주었다. 아직도 이사한 집의 번호를 알려주기도 하는구나. 받아 적은 번호로 다시 전화를 걸었다. 한 남자의 목소리. 나는 헛기침을 했다. 집전화로 누군가에게 연락하는 것이 너무나 어색했기에.

“혹시 이진수 씨 계신가요?”
잠시 대답이 없다.

“너 화영이지?”
장난스러운 목소리. 진수였다.

평범한 대화가 이어졌다. 목소리를 어떻게 알아들었냐는 둥, 어떻게 지냈냐는 둥, 그렇게 친했던 사람이 왜 연락 한 번 하지 않았냐는 둥. 목소리는 긴장되었지만 그만큼의 설렘은 없는 질문들. 매일 붙어 다녔는데도 금세 이야기꺼리가 떨어져 나는 쪽지 이야기를 꺼냈다. 부러 투정을 부리며 말했다.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해놓고 말이야. 우리는 즐겁게 말을 주고받았다. 내가 그에게 답장을 기억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진수는 잠시 기다리라고 하고 나의 쪽지를 찾아와 읽어주었다.

“<이번 시험에서 백점을 맞겠음.>”

그가 말을 끝내자마자 나는 웃기 시작했다. 떠나지 않겠다는 쪽지에 대한 답장이 고작 그런 내용이라니. 나도 참 낭만이라곤 없는 아이었구나. 별 감흥 없이 다른 대화를 이어나가다, 그만 끊으려는데 그가 물었다.

“너 아직 그 집에 살아?”

나는 그렇다고 답하고, 부동산이 춤을 추는데 이사를 한 번도 안 가다니 천연기념물들이지- 덧붙여 말했다. 이유를 물었지만 그는 아니라며 전화를 끊었다.


4.

성탄절을 목전에 둔 때였다. 세상은 온통 붉게 물들어 붉은 마음 하나 없는 나를 초라하게 만들었다. 하루나마 기쁨으로 지내자고 다들 난리인데, 마음이 통 동하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무의미한 걸음으로 집을 나가려는데, 우체통에 편지 한 통이 보였다. 진수가 보낸 것이었다. 사실 너의 쪽지는 한 문장짜리가 아니었다고. 전부 읽어주려 했는데 네가 웃는 바람에 용기를 내지 못했다고 쓰여 있었다. 자꾸 마음에 걸려 복사해 보낸다-라고 했다. 나는 쪽지를 펼쳐보았다. 그것은 쪽지라기엔 너무나 길어 편지에 가까웠다. 나는 문 앞에 앉아 나의 답장을 읽기 시작했다.


· 이번 시험에서 백점을 맞겠음.
· 세상의 모든 책을 읽어보겠음.
· 조금 더 예뻐지겠음.(실은 아주 많이)
· 나를 아껴주는 사람들에게 고맙다고 말하겠음.
· 힘들다고 쪼로록 엄마에게 달려가지 않겠음.(왜냐면 엄마도 엄마 나름 힘드니까)
· 지금보다 더 나아지겠음.
· 맞으면 때려주겠음.
· 너와 더 친해지겠음.
· 즐거운 비밀을 더 만들겠음.
· 하기 싫은 것도 하겠음.
· 삼촌이 들려준 “인생은 소풍날 수건돌리기야”라는 말의 뜻을 알아내겠음.
· 욕심낼 것은 죽어도 욕심내겠음.
· 욕심내지 않아야 하는 것은 잊겠음.
· 농담이라도 죽고 싶다고 말하지 않겠음.
· 힘들어도 힘내겠음.
· 정말 힘들면 울고불고 난리치고 때려 부수고 춤추다 웃으며 이겨내겠음.
· 후회하겠음. 그래야 후회 안 할 수 있으니까.
· 어떠한 일이 있어도 너를 떠나지 않겠음.
· 어떠한 일이 있어도 나를 놓지 않겠음.

마지막 줄에는 진수가 한 줄을 덧붙여 적어놓았다.

<이 쪽지를 절대로 버리지 않겠음.>

나는 하늘을 올려보았다. 눈 따위 내리지 않았다. 그저 추운 겨울이었다. 피어오르는 입김으로 쉬지 않고 되뇌었다. 이 쪽지를 절대로 버리지 않아 고맙다, 이 마음을 절대로 버리지 않아주어 고맙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떠나지 않는 무엇이 있다고 알려주어, 고맙다.











                                                - voigtclub.com  쁘앙님의 "모모미가 찍고 이로(=쁘앙)이 쓰는 프로젝트" 중...
                                                ' 아무 일 없어도 다들 떠나고 떠나는 세계라고, 여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