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밤이 따뜻하다고 느껴본 적이 언제였을까.

따뜻한 봄밤에
아무런 걱정 없이 땅에 누워
떨어지는 꽃잎이 무엇이든, 벚꽃이네- 혼잣말하던 날들은 이제
기억이 아닌 허상으로 다가온다.

차가운 밤.
차가운 밤은 꼭 짐승 같아.

하얀 바람의 이빨을 드러내고
나를 삼킬 듯 에워싸지만
속 시원히 삼켜주지도 않지.

술은 이미 바닥났고
두 번째 병을 사올 힘도 돈도 없는 나는
그저 술병을 들고 마시는 시늉만, 시늉만.


2.
연락 올 일 없는 핸드폰에 문자 메세지가 도착했다.

' 네가 가장 하고 싶은 일이란 언제나 나일 줄 알았어 '


한글로 찍힐 리 없는 러시아제 핸드폰이었는데,
메세지는 분명 그렇게 쓰여 있었다.

그 문장은
3년 전 그가 나를 보내며 공항에서 한 혼잣말이었다.
또렷하게 들리는 혼잣말의 아픔.

나는 그 환영 같은 메세지를 삭제하려 했다.
지워지지 않았다. 삭제 버튼을 누르고 눌러도.


3.
수화기를 들었다.
아마 한국은 새벽 3시쯤일 것이고,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연락이 끊긴 그는 아마도
번호를 바꾸었을 것이다.

국제전화 번호를 누르고,
이제 그의 전화번호가 기억나지 않는구나- 라고 내뱉는 순간
손가락은 이미 꾹꾹 어떤 번호를 눌러갔다.

전화를 받은 것은 한 할아버지였다.
다행이었다. 그가 3년 만에 노인이 된 것이 아니라면.

-죄송합니다. 전화 잘못 걸었네요.

그것이 나의 마지막 말이었다.
나에겐 이미 오래된 땅, 저 멀리 한국에서 전화를 받는 그 노인은
내가 대답할 사이 따위 주지 않고 말을 하기 시작했다.

-이봐요.
번호를 틀린 것이 아니라면 제대로 건 거예요.
그리고 나는 제대로 받은 것이고.

그렇다면,
아마 당신이 내 손자놈이 기다리는 그 사람이겠고.

이봐요.
어느 날은 말이지, 녀석이 너무 힘들어하기에
내가 얘야, 그만 잊어- 라고 말했어요.

내 손자놈은 한참을 고민하다가,
할아버지, 그냥 꾹 눌러 죽일 수 있으면 그게 마음이 아니잖아요-
할아버지, 제 마음이 벌레는 아니잖아요- 하는 거야.

이봐요.
나는 백내장이 심해져 이제 잘 보이지도 않아.
손자놈은 그런 내 건강을 누구보다 더 걱정하는 아이지요.
그런 녀석이 합숙 세미나인지 소시지인지를 간다고,
전화 받지 못할 상황이 더 많을 것 같다고,

누구보다 내 눈을 걱정하던 그 녀석이
할아버지, 이상한 번호로 전화가 걸려오면 그게 몇 시든 꼭 받아주셔야 해요-
그렇게 말하고는
이 낡은 핸드폰을 주고 갔소.

이봐요.
대체 당신은 그 추운 나라에서 뭘 하고 있는 거요.
모든 일을 끝내고 뒤돌아봤을 때 웃으며 안아줄 사람은 있는 거요?

이봐요.
당신은 지금 거기에서 뭘 하고 있는 거요, 응?



나는,
나는,
어떤 말이라도 하고 싶었다.

내가 이 나라에 와서 어떤 공부를,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웅변하듯 크게 소리치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몰래 전화를 끊고,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도 모른 채
나는

-미안해요. 나도 잘 모르겠어요. 나도 잘…….

중얼거렸지만
들어줄 사람 없어 아플 가치조차 없는, 혼잣말이었다.







                                          - voigtclub.com  쁘앙님의 문자메세지에 대한 스무개의 이야기 중에... 일곱번째..